장기려박사의 신앙과 사랑실천 - 이상규(고신대학교)
요약 : 한국의 슈바이쳐라고 불리는 장기려는 가난한 자, 약자들을 위해 봉사했던 선한 의사로서 그의 삶의 여정을 결정했던 가치체계는 기독교 신앙이었다. 그는 무교회신앙과 무교회주의자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으나 교회주의를 부정하지 않았고, 장로교회의 울타리 안에 정주하면서도 무교회주의를 수용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는 특히 기독교적 사랑을 실천한 인물이자교파적 한계에 안주하지 않았던 실천적 기독교사상가였다. 그는 기독교의 유일성은 인정하되 신앙의 다양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복음병원의 설립과 봉사, 청십자의료조합의 결성, 청십자병원의 설립 등 기독교의사로서의 삶을 통해 기독교적 가치를 고양하고, 기독교적 사회참여방식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Dr Ki Ryu Jang, who was called ‘Schweitzer of Korea,’ was 'a prominent medical doctor' and a generous benefactor of the poor and the weak in Korea. His life long service in the Gospel Hospital and other medical and social institutions was based upon Christian faith, which also was foundation of his ethical and social actions. This article is a short appraisal of life and thoughts of Dr Ki Ryu Jang who truly practiced christian love to others in the spirit of God.
성산(聖山) 장기려(張起呂, 1911-1995)박사는 선한 의사로 일생을 살며 기독자적 사랑을 실천했던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1951년 복음병원의 설립에서부터 1976년까지 25년간 원장으로 일했고, 여러 의료기관에서 봉사하였다. 특히 그는 청십자 의료협동조합을 창설하고 청신자의원을 개원하는 등 가난한 서민을 위한 의료활동을 전개하였고, 막사이사이상을 비롯한 여러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실천적 의사로서, 그의 삶을 결정했던 행동양식(behavior pattern), 신념체계(value system), 그리고 그의 사회적 활동(social action)의 기초는 기독교신앙이었다. 이제 그의 생애 여정과 신앙, 그가 남긴 정신적 유산 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생애와 삶
장기려(張起呂, 1911-1995)박사는 1911년 음력 8월 14일 (호적상으로는 1909년 7월 15일)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양하면(楊下面) 입암동(立岩洞) 739번지에서 한학자였던 장운섭(張雲燮)과 최윤경(崔允卿)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여섯 살 때인 1918년 부친이 설립한 의성학교(義聖學校)에 입학하였고, 5년간 교육을 받은 후 1923년 졸업하였다. 목사가 된 김치묵(金致黙), 전 대법원 행정처장을 지낸 김병화(金炳華)는 동기동창이었고 테너 가수인 이인범(李仁範)은 3년 후배였다. 의성학교를 졸업한 그는 송도(松都)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고 이 학교에서 5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1928년 졸업하였다. 한 때 모교인 의성학교 교원으로 일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상급학교에 진학하기로 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專)에 지원하였다. 이 학교를 선택한 것은 가정 사정을 고려하여 단순히 학비가 싼 학교를 선택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장기려는 이 학교에 입학하게만 해 준다면 치료한 번 받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장기려 회고록」(규장문화사, 1985), 22 (이하에서는 ‘회고록’으로 표기함)
아마 이것이 ‘선한 의사’로서의 생애를 결단했던 첫 출발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 학교에 입학한 그는 5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1932년 3월 졸업하였고, 그해 4월 9일 김봉숙(金鳳淑)과 결혼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그는 장인이 된 김하식(金夏植)의 권유로 백인제(白麟濟) 선생 문하에서 외과를 전공하였다. 그 후 그는 후복막 봉과직염(後腹膜 蜂窠織炎)과 패혈증(敗血症)에 관한 연구를 하였고, 1940년 3월에는 “충수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의 세균학적 연구”라는 제목의 의학박사 학위 청구논문을 나고야(名古屋)대학에 제출하였고 그해 9월에 통과되어 의학박사가 되었다.
그 동안 경성의전 외과에서 봉사했던 그는 이용설(李容卨)의 소개로 1940년 3월 평양의 연합기독병원 외과 과장으로 갔다. 이 병원은 1891년 의료선교사로 내한한 감리교의 윌리엄 홀(Dr William Hall, 1860-1895) 윌리엄 홀의 한국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의 미망인인 로세타 셔우드(Rosetta Sherwood)여사가 쓴 The Life of Rev William James Hall, M.D.를 참고할 것.
이 1894년 11월 34세의 나이로 한국에서 사망하자 그의 미망인에 의해 1897년 설립된 기홀병원(紀忽病院, The Hall Memorial Hospital)으로 시작되었는데, 191921년에는 평양의 장로교병원 평양의 장로교 병원은 1895년 진료소로 시작되었는데, 1906년 이후 제중병원으로 개칭되었고, 1915년부터 북감리회의 기홀병원과 합병을 모색하던 중 1921년부터 합병되었고, 1923년에는 광혜여원(廣惠女院)과도 합병되어 평양연합기독병원으로 발전하였다.
과 합병되어 운영해 오다가 1923년에는 역시 평양의 광혜여원(廣惠女院) 광혜여원(廣惠女院)은 미북감리회 해외여성선교회(WFMS)가 후원한 병원인데, 이 병원은 1894년 5월 영의사 로제타 홀에 의해 시작되었다. 남편 윌리엄 홀의 병원 한쪽에서 부인 진료소롤 시작되었는데, 1898년에는 광혜여원으로 발전하였다. 이만열,「한국기독교의료사」(아카렛, 2003), 121.
과도 합병되어 평양 연합기독병원(Pyengyang Union Christian Hospital)으로 개칭된 평양지방의 기독교 병원이었다. 이 병원을 연합병원이라고 한 것은 감리교 선교부와 장로교선교부가 연합하여 운영하던 병원이었기 때문이다. 장기려박사가 이 병원으로 옮겨 간지 두 달 후인 그해 11월에는 원장이었던 북감리교 선교사 안도선(安道宣, Albin Garfield Anderson, 재한기간 1911-1941)이 귀국하게 되자 장기려는 박사학위 소지자라는 이유로 병원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인사에 불만을 가진 이들의 질시와 시기 때문에 두 달만에 원장직에서 물러나 외과과장으로 강등되었지만 변함없이 성실히 봉사한 일은 아름다운 일화로 회자되고 있다. 그는 이 때를 회고하면서 “환자 치료에만 전념할 수 있는 강등 자체는 조금도 서럽지 않았으나 텃세는 서러웠다”고 술회하고 다시 외과과장직으로 돌아와 일한 10개월 동안은 그의 생애를 통해 “가장 밀도 있는 신앙생활을 했다” 회고록, 39
고 했다. 이곳에서 믿음으로 사면초가를 극복한 일은 “평생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보람이 있었을 때였다” 회고록, 54.
고 회고했다.
평양연합기독병원에서 일한 기간인 1942년에는 후학인 민광식(閔珖植)과 함께 “농흉(膿胸)에 관한 세균학적 연구”라는 논문을 조선의학회지(朝鮮醫學會誌)에, 단독연구인 “근염(筋炎)의 조직학적 소견”을 일본외과학회에서 발표했다. 1943년에는 간상변부에 발생한 간암의 설상절제수술(楔狀切除手術)을 실시하고 그 결과를 조선의학회에서 발표하여 주목을 받은 일도 있다. 신경쇄약으로 휴양 중에 해방을 맞은 장기려박사는 그해 11월에는 평양도립병원장 겸 외과과장으로 약 일년간 일했다. 1947년 1월부터는 김일성대학의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겸 부속병원 외과과장으로 일했다. 그는 주일에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이 대학으로 갔고, 이 학교에 근무하면서도 주일을 지키고 환자를 수술할 때는 먼저 기도하는 등 일관된 신앙의 길을 갔다. 그의 성실함과 신실함, 그리고 검소한 생활 때문에 이곳에서도 그는 인정을 받았고, 1948년에는 북한 과학원으로부터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기도 했다.
1950년의 한국전쟁과 분단은 커다란 시련을 안겨 주었다. 장길박사는 1950년 12월 차남 가용(家鏞)과 친구 7-8인과 함께 남하하여 그 달 18일 부산에 도착하게 되는데 평양 종로 앞에서 마지막 본 아내와 다른 가족이 함께 남하하지 못한 것은 일생동안의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부산에 온 그는 곧 부산 제3육군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약 6개월간 봉사했던 그는 1951년 6월 경남구제위원회의 총무 전영창(全永昌)선생, 서기겸 회계인 김상도(金相道)목사와 초량교회 담임목사였던 한상동(韓尙東)목사의 요청으로 부산 영도구 남항동에 위치한 제3영도교회 창고에서 무료의원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다. 전영창과 한상동으로부터 함께 일하자고 요청받은 날은 1951년 6월 21일이었고, 복음병원의 설립과 장기려의 봉사는 7월 1일부터였다. 장기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951년 6월 21일 한상동목사님과 전영창선생이 제3육군병원에 찾아오셔서 당시 피난민들을 위하여 무료병원을 하려고 하니 도울 수 있겠는가 하고 물으셨다. 나는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쾌히 허락하고 1951년 7월 1일부터 복음병원에 나가 그 후 25년간 일했다.”(장기려, “한상동목사님과 나”,「월간고신」, 1986. 1월호, 41).
이 때부터 그는 1976년 6월까지 25년간 복음병원 원장으로 그리고 의사로 일했는데 초기 복음병원 시절은 의사로서 가장 보람된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회고록, 54.
그는 복음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동시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로(1953. 3.-1956. 9),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및 학장으로(1956. 9-1961. 10), 서울 카토릭 의대 외과학 교수로(1965-1972. 12) 봉사하기도 했다.
이 당시 부산, 경남지방에는 의료기관이 많지 않을 때였으므로 복음병원은 이 지역 보건증진을 위해 큰 기여를 했다. 특히 그가 원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기간은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구호, 자선병원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복음 병원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 장기려는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에 외과를 창설한 일도 이 지역 의료계를 위한 기여라고 볼 수 있다. 장기려는 1959년 2월에는 간의 대량절제수술을 성공하였는데 당시에는 간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던 때이므로 그는 이 분야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간암에 대한 연구로 그는 1961년 대한의학회 학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의료활동 외에도 그는 1956년 전도 및 성경공부를 위한 목적으로 “부산모임” 이 부산모임은 1956년 시작되어 32년간 계속되다가 1988년 해산되었다. 이 모임은 처음에는 부산대학 의과대학의 장기려선생 연구실에서 모였고, 주로 의사나 의학도들이 모였다. 1959년부터는 복음병원 원장사택, 곧 장기려선생 집에서 모이기 시작하였고, 장기려선생이 서울로 옮겨 간 후인 1961년에서 1964년까지는 부산 완월동에 위치한 이중탁선생 댁에서 모였다. 1965년에서 1966년에는 다시 복음병원 원장 사택에서, 1967년부터는 초량에 있는 복음병원 분원에서 모였다. 1968년부터는 공개모임으로 모이기 시작하였고 부용동 기독교사회관에서 월1회 함석헌선생의 강의가 있었다(김서민의 위의 글, 18-20 참고).
을 시작하였고, 1959년에는 일신병원 설립자였던 매켄지(Dr Helen Mackenzie), 내과의사인 이준철(李俊哲), 치과의사인 유기형(劉基亨) 등과 함께 '부산기독의사회'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복음에 대한 그의 관심의 일단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특히 1968년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 위치한 복음병원 분원에서 채규철(蔡奎哲), 조광제(趙光濟), 김서민(金瑞敏), 김영환(金永煥) 등과 함께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발족한 것은 그가 남긴 소중한 유산이다.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받자” 라는 취지로 시작된 이 의료보험조합은 순수 민간단체에 의한 의료보험 기구로서 영세민들에게 의료 복지 혜택을 주기 위한 기독교적 자애정신에 기초한 기구였다. 정부가 의료보험제를 실시하기보다 10년 앞서 시작된 이 의료보험조합은 1975년에는 의료보험조합 직영의 청십자의원 개원을 가능케 했고, 이듬해에는 한국 청십자 사회복지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그의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1979년 8월에는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복음병원에서 은퇴한 후에도 청십자의원에서 진료하는 등 여러 사회봉사활동을 계속하였고 은퇴가 없는 일생을 살았다. 그의 삶의 여정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볼 때 사랑, 생명, 평화는 그의 생애를 엮어간 주요어(key word)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그의 삶의 기초로서의 기독교 신앙
장기려박사의 생애와 그의 삶의 여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앙이었다. 기독교신앙은 그의 삶과 인격 그리고 세계관의 기초였다. 그의 이타적(利他的) 삶,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인술은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신앙은 그의 삶의 근거이자 기초였고, 그의 삶의 과정에 의미를 주었던 동력원이었으며 그의 삶의 목표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그의 84년간의 생애를 움직여 왔던 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신앙의 자취를 살펴보는 일은 그의 생애 여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1) 무교회주의의 영향
그는 어릴 때 할머니를 통해 신앙을 배웠고 교회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송도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인 1925년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깨닫고 신앙적 삶을 모색하게 된 것은 경성의전을 졸업한 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경성의전을 졸업한 후 그는 후지이 다께시(藤井武),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 야나이하라 다대오(失內原忠雄), 김교신(金敎臣, 1901-1945), 함석헌(咸錫憲, 1901-1989) 등의 저서를 읽었는데 회고록, 25.
일본의 무교회적 인사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특히 그는 김교신의「성서조선」을 정기구독 하였고, 1942년 3월「성서조선」제158호의 권두문인 “조와”(弔蛙)라는 글이 문제가 되었을 때 그는 정기 구독자라는 이유 때문에 김석목(金錫穆), 유달영(柳達永) 등과 함께 평양경찰서 유치장에 12일간 구금된 일이 있다. 김교신이 일본 유학에서 귀국한 때는 1927년 3월이었고 이들은 우찌무라의 영향을 받아 김교신은 1919년 3월 일본에 건너갔고 1920년 4월 16일 동경에서 노방전도를 받고 신자가 되어 그해 6월 27일 동경 시래정(矢來町)성결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교회에 출석하면서 제도교회의 문제점을 목격한 그는 일시 번민하다가 그해 말에 내촌의 문하에서 성경을 배우게 된다. 이때부터 7년간 내촌의 문하에 있던 그는 1927년 3월 귀국하였다. 그는 “감히 말하노니 내촌감삼선생은 나에게 유일한 선생이다. 다시 말하노니 나는 선생을 가진 사람이다”라고 확언했을 만큼 내촌의 영향을 받았던 인물이다(김교신, “내촌감삼론에 답하여”, 노평구 편,「김교신전집」제1권, 322. 참고).
조국의 복음화를 가슴에 안고 “성경을 조선위에, 조선을 성경위에” 라는 일념으로 1927년 7월「성서조선」을 창간했었다. 장기려가 일본 무교회 인물들의 저작을 접했을 때가 경성의전을 졸업한 후였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아마도 1930년대 초부터 ⌈성서조선⌋을 구독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장기려는 김교신 김교신은 일본인들에게도 상당한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失內原忠雄, “김교신을 추억함”,「架信」, 1945. 9; 高崎宗司, “金敎臣과 聖書朝鮮”,「文學」, 1980. 2, 72-86 참고) 특히 야나이하라는 김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바 있다. “나다나엘이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불리운 것처럼 김교신씨는 참 조선사람이었다. 그는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 민족을 사랑하고 조선말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의 민족애는 고루한 배타적인 민족주의와는 달랐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신생한 조선 사람이었다. 온유, 근면 등 조선사람으로서의 생래의 미덕이 그에게는 믿음에 의해 한층 승화되어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안에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였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애국활동이었다. 미국식의 천박한 기독교가 아니고 불신앙의 소련 공산주의도 아니고 더욱이 세속적인 민족주의도 아니고, 권력자에 대한 영합, 협조도 아니고 순수한 무교회의 신앙에 의해 조선 사람의 영혼을 신생시키고 이를 자유와 평화와 정의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 그는 일생을 바쳤다. ...... 나는 ‘이스라엘에서조차도 볼 수 없는 신앙’을 ‘희랍인’사이에서 찾아낸 것이다.” (노평구 편,「金敎臣과 韓國」, 경지사, 1975, 116 참고). 야나이하라는 김교신을 가르켜 “순수한 무교회의 복음신앙에 의해 조선 사람의 영혼을 신생시키고 이를 자유와 평화와 정의의 백성되게 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고 했다. 이진구, “김교신선생의 통곡,”「聖書信愛」, 제259호, 1980. 6, 30 참고.
, 함석헌 함석헌은 김교신과「성서조선」을 제작한 동인이고 1955년에서 1957년 사이에「말씀」이라는 제호의 개인지를 발간하였고, 1970년 4월부터 1980년까지는「씨의 소리」를 펴냈는데 장기려는 이 잡지의 독자였다.
등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장기려는 “김교신은 내가 가장 영향을 받은 사람 중의 하나이다” 회고록, 41.
라고 고백했을 정도였다. 또 10년 연배였던 함석헌으로 부터도 적지 않는 영향을 받았는데 그를 처음 만난 때는 1940년 1월초 서울 정릉에 있던 김교신의 집에서였다. 장기려, “그리스도인 장기려,”「나의 스승 함석헌」김용준편 (해동문화사, 1991), 13. 이때 장기려는 김교신, 함석헌 외에도 송두용(宋斗用) 등 성서조선 동인들을 만났다(장기려, “곁에서 본 송두용 선생”,「신앙만의 신앙」, 제일출판사, 1975, 418).
이때부터 그는 함석헌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를 존경하였고 깊은 교우관계를 유지하였다. 회고록, 75.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장기려는 당시 대표적인 무교회주의자들과 교제하였고 저들을 통해 깊은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자신은 교회주의자로 머물러 있었다. 해방이 되고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되었던 산정현교회가 다시 집회를 시작했을 때, 곧 1945년 9월부터 그는 평양의 산정현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장기려, “8.15에서 6.25까지에 있어서의 평양 산정현 교회,”「부산모임」 104호(1985. 6), 1. 장기려에 의하면 이 당시 산정현교회에는 출옥하신 이기선, 채정민, 한상동, 김의창목사가 함께 있었고, 장로들로는 방계성, 조만식, 김동원, 박정익, 유계준, 김봉순, 오윤선, 김찬두장로가 교회를 지도했다고 한다. 한상동목사가 남하하고, 이기선목사가 신의주제일교회 담임으로 가신 후에는 김의창목사가 당회장으로 있고, 방계성장로가 설교했다고 한다. 후일 방계성 장로는목사 안수를 받았다.
곧 집사가 되었다. 또 청년반의 성경강해를 맡아 봉사했는데, 로마서를 강해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때는 그가 평양인민병원 원장 겸 외과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장기려, 위의 글, 3.
1948년 8월에는 양재연집사와 함께 산정현교회에서 장로로 장립받았다. 말하자면 교회주의자로 제도교회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무교회주의자들의 성경연구와 그 가르침을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주기철과 무교회주의자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았고, 후일에는 신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상합할 수 없는 함석헌과 한상동 사이에서 괴리를 느끼지 않았으며, 양자와 깊이 교제했다. 그는 교리적 일관성보다는 영적 유익을 우선시했고, 교리적 다양성을 인정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경건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19세기 스위스 태생의 미국교회사가인 필립 샤프(Philip Schaff, 1819-1893)와 흡사했다. George H. Shriver, "Philip Schaff as a Teacher of Church History," Journal of Religious History, Vol 47 (March 1969), 75. 그리고 그의 학문과 신학, 신앙적 관심과 성향에 대해서는 그의 자전적인 기록인, “Autobiographical Scrapbook" (Union Theological Seminary Library, N.Y. City)을 참고할 것.
장기려는 어느 양극단에 안주하여 다른 하나를 무시하는 교조주의적 편협성에 빠지지 않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남하한 이후 장기려박사는 이이라장로, 박덕술권사와 함께 1951년 10월 부산 중구 동광동에서 북에 두고 온 산정현 교회를 재건하였다. 그가 남하한 이후 첫 주일인 1950년 12월 24일 한상동목사가 시무하던 초량교회에 참석하여 예배드렸고 제3육군병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정보기관, 삼일사에 끌려가 일주일간 조사를 받은 일이 있는데 이때 한상동목사와 미국정통장로교(OPC) 선교사인 치과의사 최의손(崔義遜, Dr William H. Chisholm)이 그의 신원을 보증해 주어 풀려난 일이 있다. 장기려는 산정현교회를 재건하기까지 초량교회에 출석하였고, 장기려는 함석헌에 대한 회고기에서 “나도 1950년 12월 평양을 떠나 12월 20일 부산에 도착하여 제3육군병원에 있으면서 주일에는 한상동목사님이 섬기던 초량교회에 나갔다.”고 회고했다(장기려, “그리스도인 함석헌,” 15).
때로 영도교회, 곧 지금의 영도제일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보인다. 한상동목사와는 평양에서부터 이미 교제가 있었고 그의 요청으로 복음병원을 개원, 상호 협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상동목사가 당시 장로교총회 유지제단으로부터 초량교회 명도를 요구받고 1951년 10월 초량교회를 떠나 삼일교회를 설립할 때 한상동목사를 따르지 않고 전기한 인사들과 함께 산정현 교회를 재건한 것은 아마도 제도 교회의 문제점, 특히 교단분열과 대립의 와중에서 비 본질적인 문제에 관여하지 않고, 도리어 이런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당시는 해방 후 계속된 장로교회내의 대립으로 장로교회는 혼란한 중에 있었고 1952년에는 고신이, 1953년에는 기장이 분열되는 등 교회의 문제가 있었다. 이런 문제는 장기려로 하여금 교권이나 교단조직으로부터 자유한 독립교회를 추구하게 하는 동기를 준 것으로 판단된다. 장기려선생 등이 산정현교회를 재건한 것은 이런 이유 외에도 두고 온 교회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 그리고 남하한 산정현 교회 출신 교우들간의 연대감도 크게 작용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산정현교회를 어느 교단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교회로 한 것을 보면 이 점은 더욱 분명하다. 산정현교회는 설립 이후 독립교회로 있었으나 1978년 8월 통합교단 소속이었던 박광성 목사의 부임과 함께 통합교단에 가입하였다.
이렇게 볼 때 장기려는 비록 제도교회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무교회적 주장을 유효한 가르침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성서조선」의 동인이었던 송두용은 장기려에 대하여 "교회도 떠나지 않고 무교회의 신앙을 이해하며 그것에 대하여 변치 않는 태도가 좋습니다.“ 장기려, “곁에서 본 송두용선생,”「신앙만의 신앙」(서울: 제일출판사, 1975), 419.
라고 말한 바 있다. 산정현교회 장로로 봉사해 온 그는 1981년 12월 시무장로에서 은퇴하였고 원로장로로 추대되었다. 1987년부터는 흔히 ‘종들의 모임’이라고 불리는 비교파적, 비 조직적 초기교회적 신앙운동 단체에 관여하였고 장기려 선생이 종들의 모임에 관여한 시기에 대해서는 손동길선생의 증언에 기초함(1996.12. 24)
그가 치료차 서울로 옮겨가기까지 이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평소 제도교회의 모순과 문제점을 보고 지냈던 그는 모든 외형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 순수한 복음운동에 관심이 많았고, 따라서 그는 ‘종들의 모임’에서 영적 안식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은 그의 신앙 여정을 종합해 볼 때 그의 신앙사상에는 무교회주의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건전한 종교”라는 글에서 “종교가 사람의 손으로 지은 회당에 서 있고 사람의 의식에 치중하고 또 신앙개조 만을 고조하고 음악과 예술적 표현 및 통계만을 들어 평가하게 될 때에는 그 종교는 불건전하다.”고 말하고 이런 외형적인 것에 메이지 않는, 외적인 것으로부터 자유한 복음적 신앙이 참된 종교라고 강조한 바가 있다. 장기려, “건전한 종교”,「부산모임」, 제13호(1969. 6,7호), 2.
이렇게 볼 때 그는 교회의 전통이나 신앙고백, 교리적 내용(doctrinal integrity)에 대한 관심 보다는 이런 것들에 메이지 않는 신앙운동, 신앙적 실천, 삶이 있는 신앙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는 신앙의 정통성(Orthodoxy)의 문제보다는 신앙의 정체성(Identity)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가졌던 분으로 평가된다.
2) 기독교 유일성과 신앙적 다양성
앞에서 언급했듯이 장기려는 김교신과 함석헌으로부터 적지 않는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김교신은 1945년 4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함석헌과의 관계가 보다 깊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는 함석헌의 모든 사념(思念)을 다 수용한 것은 아니다. 함석헌은 1970년 4월「씨의 소리」를 발행하면서 민주화 운동의 선두에 서 있었으나, 장기려는 이런 일에는 직접적으로 간여하지 않았다. 함석헌이 민주주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한 점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했으나 한국사회의 문제, 곧 민주화를 이룩하려는 정치적 활동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아마도 장기려는 함석헌의 사회참여 방식이 사회문제의 근본적 해결의 길이라고는 보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어떤 점에서 함석헌은 현실주의자였다면 장기려는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차라리 김교신처럼 신앙운동, 사랑의 실천을 통해 사회의 문제를 개혁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 장기려가 함석헌의 입장을 수용하고 있는 점에는 약간의 의문이 있다. 함석헌의 신학 혹은 신앙사상은 변화가 많았고, 또 종교상대주의자 혹은 다원(凡)종교주의자였는데 어떻게 기독교 유일사상의 신봉자인 그가 함석헌의 사상를 수용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함석헌은 1921년 오산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유영모(柳永模)를 통해 무교회주의를 배우고 도일한 이후 김교신을 따라 우찌무라 간조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함석헌,「나의 자서전: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서울:삼중당, 1964), 162.
그래서 그는 적어도 1960년대까지는 무교회주의자였다. 그러나 1960년대를 거쳐 가면서 퀘이커교도(Quaker)로 전향하였다. 객관적 말씀 혹은 외적 말씀으로서 기록된 성경 보다는 내적 말씀 곧 내적 빛(Inner light)을 강조하는 주관주의적 성향이 짙은 반전주의적(反戰主義的)인 퀘이커는 함석헌에게 매력적이었고, 결국 그는 형식적으로는 무교회주의에서 떠났다. 비록 그가 1964년 10월 일본의 무교회 인물인 마사이게(政池 仁)와의 대담에서 “나 자신은 무교회 신자라고 생각 한다”라고 했으나“감정을 넘어선 가교”(대담),「사상계」, 1964 11월호 참고
사실 그는 퀘이커 집단의 일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함석헌에게는 변화가 많았다. 특히 함석헌은 제도교회의 무용론을 지나치게 역설했고, 심지어는 교회주의는 바리새주의라고 함석헌, “무교회, 상(上),”「성서조선」, 제86호(1936. 3), 6.
매도하고 “조직적 교회를 시인하는 것은 분명히 비그리스도적이다” 함석헌, 위의 글, 7
라고 하였다. 한숭홍교수는 “함석헌은 교회란 마치 악마적 권위로서 신앙인을 위협하고, 협박하고 금전적인 것을 수탈하기 위해 인위적인 미신적 의례를 신성한 효험과 신의 본체로서 믿도록 강요하고 계속 복종을 강요하는 집단으로 분석하고 있다” 한숭홍,「무교회주의」(두란노, 1993) 36-37
고 지적했다. 함석헌은 교회주의를 이처럼 비판하면서도 타 종교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함석헌은 1942년「성서조선」사건으로 감옥에 있는 동안 “불교경전을 조금 읽었다. ..... 그러는 동안에 불교와 기독교는 근본에서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고, 자서전, 166
6.25 동란 중에 “인도교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됐고 읽을수록 종교는 하나라는 생각이 분명해 졌다.” 자서전, 167
라고 했다. 또 1964년에는 “나는 지금 종교는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자서전, 167.
함석헌은 교회제도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신앙, 성례, 교의, 신앙고백, 교회조직 까지 부정하는 극단적 무교회주의자였는데 후기에 와서는 기독교의 유일성까지 부정하고 종교상대주의 혹은 종교다원주의로 발전하였다. 그는 중세 신비주의와 매우 흡사한 주지주의적 신비주의자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그의 사상 때문에 신비적 성향이 강한 퀘이커에로의 전향이 무리 없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의 후기 행적을 보면 어떤 점에서 함석헌은 기독교 신앙인이라기 보다는 범종교주의자(凡宗敎主義者)였다. 모든 종교를 포용하는 듯하면서 동시에 타종교와의 경계선을 제거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종교상대주의 혹은 종교다원주의에 머물지 않고 범 종교주의적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이런 생각은 1970년데 이후가 아니라 이미 1940년대부터 가졌던 사상이다. 김서민의 증언에 의하면 장기려선생은 “함선생은 예수를 믿는다고 두 번이나 확답하셨다”는 기록을 남겨주고 있다(김서민, “자유한 삶,”「씨마당」, 제8호, 1996. 2. 20) 이 기록을 보면 장기려 선생 자신도 함석헌의 신앙관에 의문을 갖고 계셨고, 이 문제에 대해 함석헌 자신의 대답을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그는 김교신과는 분명히 달랐다. 김교신과 함석헌의 신앙사상의 동질성 혹은 유사성에 관한 논의는 이진구, “김교신선생의 통곡”,「성서신애」제 259호(1980. 6), 22-31 참고할 것.
그러나 장기려의 함석헌과의 교분은 계속하였다. 그가 함석헌과의 오랜 교분과 인간적인 우정을 유지한다는 것은 탓할 바가 못 된다. 문제는 자신의 신앙정신과는 명백하게 다른 함석헌을 ‘부산 모임’의 월1회 정기 강사로 청하였고, 1968년부터 1988년 6월까지 20년간 김서민, “자유한 삶”,「씨마당」, 제8호(1996.2), 19, 20. 김서민의 기록에 의하면 부산모임을 공개로 갖기 시작한 때는 1968년부터라고 했고, 이때부터 함석헌의 부산모임강의는 약 20년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김서민에 의하면 공개모임 이전인 1964년부터 함석헌의 월1회 정기강의가 시작되되 1988년 6월까지 계속되었다고 회상한다. 이렇게 보면 함석헌의 부산모임 강의는 24년간 계속된 샘이다(김서민, 앞의 글, 20).
그의 강의를 듣도록 한 일은 장기려의 ‘오직 믿음’(sola fide)의 길을 이해하는데 다소 혼란을 주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를 장기려의 개인적인 친분 관계로만 이해할 수 있겠지만,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문제는 개인적 친분 그 이상의 것이다. 긍정적으로 보면 그의 대승적(大乘的) 포용성이라고 할 수 있으나, 다른 한 편으로는 장기려박사 자신의 주장처럼 복음전도를 위한 ‘부산모임’에 월 1회 범종교주의자를 강사로 청했다는 점은 논리적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필자도 이 모임에 참석한 일이 있지만 월1회 함석헌을 초청한 부산모임은 전도를 위한 집회가 아니라, 시국강연회의 성격이 짙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보면 장기려는 교회의 전통이나, 신학, 혹은 교의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타인의 신앙이나, 자신의 신학적 일관성에 대해서는 상당히 무관심했다. 사실 그는 복음병원 재직 중 자신의 휘하에 있는 이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권하거나 안내한 일이 드물었다는 점은 이런 그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장기려박사와 같은 입장은 18세기의 경건주의적 입장인데, 장기려 본인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을 수 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상당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정리해 보면 장기려의 신앙사상은 교회역사와 전통을 중시하기보다는 현실적 응답을, 공동체적이라기 보다는 개인적인 성격이 짙으며 모든 기구, 조직, 제도로부터 떠나고자 했던 자유교회적이었다. 이런 점에서 장기려는 “자유한 믿음을 가진 분”이라는 김서민의 지적「시민시대」, 제136호 (1996. 2), 182.
은 그릇되지 않다.
3. 그가 남긴 것
이상에서 우리는 그의 생애와 신앙의 자취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는 비록 교리나 신학전통에 대한 무관심으로 경건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으나, 그의 순수한 신앙, 복음에 대한 순전한 열정, 기독자적 삶에 대한 일관된 생애는 그 모든 것을 덮을 만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생애 여정 속에 서 보여준 몇 가지 사랑의 실천에 대해 정리해 두고자 한다.
1) 기독교적 가치(Christian Values) 고양
장기려박사는 일평생 동안의 삶을 통해 기독교적 가치를 고양한 인물이었다. 그는 일생동안 봉사자의 삶을 살았고 겸손하고도 소박한 삶을 살았다. 그는 자기를 드러내고자 시도하지 않았다. 그는 박사학위가 흔치 않을 때에 박사학위를 얻었으나 박사로 불리기를 원치 않았고, 그저 선생으로 불러 주기를 바랐다. 큰 업적을 남기고도 상 받기를 거절하였고, 시상식에 나가지 않는 일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어떤 것을 남기고자 하는 의도가 없었다. 비록 자신에 관한 몇 권의 책이 출판되기도 했으나 그것은 자신의 의사와는 반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무명(無名)에의 의지’로 산 분이었고, ‘오직 믿음만’으로 살고자 했다. 자신의 유언처럼 “오직 주를 섬기다가 간 사람” 이기를 원했다. 이것은 개인의 신앙적 인격이지만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그에게는 신앙적 비범함이 있었다. 그에 대한 여러 가지 호칭들은 이런 그의 삶의 편모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에게 중요한 점은 그는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하나님 사랑의 방법이었다. 그는 기독자적 사랑을 강조하였고 그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특히 사랑을 강조한 요한서신을 좋아하였다. 그는 “요한의 사랑의 철학”이라는 글「신앙만의 신앙」, 235-245.
에서, “사랑의 철학은 생명철학의 일대혁명이다”고 전재하고,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말에서 우리는 사랑의 본체를 발견한다. 사랑은 확실히 인생의 지상선이다. 사랑에 있어서 율법은 완성된다. 도덕의 도덕, 생명 중 생명은 사랑이다.” 라고 한 다음,
사랑의 유일한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또 하나님과 결부되지 않고는 사람은 결국 사랑할 줄 알지 못한다. 그런데 한번 깊이 생각할 바가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만 있다면 사람에 대한 사랑은 자연이 그것으로부터 일어나리라고 해서 사람에 대한 사랑의 부족을 변호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우리들에 대한 사랑의 반향은 우리들의 하나님의 사랑보다도 차라리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 위의 글, 241.
고 했다. 또 “바울의 사랑의 찬미”라는 글「부산모임」, 제11호 (1969. 1.2월호), 12-18.
에서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고, 사랑은 영원하며 사랑은 생명 그 자체라고 했다. 그는 사랑과 생명, 평화 이것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겼고, 그의 삶은 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생애였다.
그는 신앙과 삶의 동일한 좌표를 가진 언행일치, 신행일치의 삶을 추구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굴절된 삶으로 비난받는 우리 시대에서 그는 기독교적 가치를 고양하여 주었다. 그가 끼친 가장 큰 공헌은 진정한 의미의 기독자적 삶(Christian Life)이 얼마나 큰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물론 신학이론이나 교의, 그리고 교회적 전통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삶에 의미를 주지 못하면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고, 교리나 신학 이론, 논리적 체계는 냉냉한 이성의 동의는 얻을 수 있으나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기는 어렵다. 장기려박사는 그의 삶에 뿌려진 열매를 통하여 한사람의 기독자적 삶이 가져올 수 있는 그 큰 위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 진정한 기독자적 삶을 살 때 그 영향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 주었는데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교훈과 경고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그의 생애와 삶은 한국교회 현장에 떨어진 거룩한 폭탄이다.
2) 삶을 통한 한국교회 개혁
둘째로 그의 생애는 한국교회와 사회를 개혁하는 삶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그는 한국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한국교회의 문제를 신랄하게 지적하고 비판하지는 않았으나 한국교회의 지나친 외적 성장운동이나 교회당 건물을 크게 짓는 것 등을 포함한 외형적 확장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다. 사실 한국교회는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의 ‘잘살아보세’ 철학, 곧 경제성장 제일주의의 영향으로 성장(成長)을 제일의적 과제로 수용하였고, 이런 과정에서 다른 가치들을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장박사는 교회가 건물을 크게 짓는다던가 외형적 확장에 우선적인 관심을 쓰는 것은 신앙의 본질일 수 없다고 보았고, 이런 경향을 자본주의적 맘몬이즘으로 이해하였다. 한국교회가 외적 성장에 대해 골몰하고 있을 때인 1975년에 다음과 같이 쓴 일이 있다.
밀톤의 「낙원상실(실락원)」을 읽어보면, 맘몬은 고층건물을 잘 짓고, 물질세계의 발전을 잘 일으키는 재능이 있는 마귀로 묘사되었다. 이것을 읽은 뒤부터는 고층건물을 보면 맘몬의 힘을 연상하게 된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딕건물 예배당도 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지지 아니하고, 사람의 예술품은 될지언정 맘몬의 재주인 듯한 느낌이 든다. 또 우리는 이 세상에서 권세와 지위와 명예 그리고 사업의 번영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축하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여 살던 사람들에게 내려주시는 선물이었던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맘몬과 타협해서 산 결과로 된 것이 아니었던가?「부산모임」, 1975. 10.
그는 교회가 복음의 본질적인 활동보다는 외적 성장이나 외형적 확장을 중시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적이었고, 그것은 맘몬이즘으로 강조하였다. 그는 또 “나는 한국의 기독교는 자본주의 기독교라고 해서 혹독히 비평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맘몬과 타협하고 보조를 같이 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도 않았었다.” 위의 글.
고 말한 일이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검소하고도 청빈한 삶은 이런 자본주의적 가치에 대한 비판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한국교회의 문제를 지적해 주고 그 문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우리사회나 교회의 문제와 모순, 부정과 부패를 비판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 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방법은 기독교적 삶이다. 기독교적 삶, 곧 말씀에의 순종, 감사, 사랑의 실천은 가장 중요한 사회 비판이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혁명적인 방법으로 이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시도, 즉 체제와의 싸움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였을 뿐이다.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하는 최선의 방법은 검소한 삶을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물질과 재물에 대한 자유함, 그리고 가난하고 핍절된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순종과 감사의 행위이며 물질주의적이며 배금주의적 삶의 방식에 대한 가장 확실한 ‘사회비판’이다. 장기려는 “나도 늙어서 가진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은 다소의 기쁨이기는 하나 죽었을 때 물레밖에 안 남겼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 회고록, 75.
고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이상으로 여겼고, 간디를 닮아보려고 애썼다. 동아일보, 1982. 2. 7.
그의 무소유의 삶 자체가 물량지향적인 우리 사회와 교회에 대한 비판이었다. 불의한 사회를 비판하는 최선의 길은 우리가 의롭게 사는 것이다. 이 처럼 장기려는 자신의 삶을 통해 한국교회와 사회를 비판하고 개혁하고자 했다. 그의 사랑의 실천철학 장기려, “사랑의 실천철학”,「청십자」, 제153호 (1985. 3. 4)
은 가장 효과적인 사회비판이자 사회개혁 운동이었다. 이것을 우리는 삶을 통한 개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3) 기독교적 사회참여 방식의 모델 제시
장기려는 한국교회에 기독교적 사회참여 방식 혹은 기독교적 사회봉사의 한 모델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사회참여 방식은 양극화되어 있다. 진보적 교회는 1970년대 이후 인권운동, 민주화운동 등 제도나 조직의 개선을 위해 싸웠고, 개인구원에 대한 무관심은 죄의 심각성을 간과하는 약점이 있었다. 또 보수적인 교회는 사회에 대한 관심보다는 개인구원에 일차적인 관심을 둠으로서 결과적으로 사회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하였고, 기독교 이념의 사회화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따라서 사회변화와 개선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장기려는 양극단을 지향하고 기독교 정신의 사회화를 추구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앞서 언급한바 있는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운동이다. 기독교적 사랑, 가난한 이웃에 대한 배려, 이타적 생활방식, 이것은 기독교 정신이며 개인의 생활을 통해 의미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독교적 정신을 개인의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이를 조직화하고 제도화한 것이 바로 의료보험조합이다. 당시 한국에서는 의료보험의 개념이 인식되기도 전에 의료협동조합을 만들었고 담배값 일백원에도 못 미치는 월 70원의 회비를 받은 것을 보면 그것이 가난한 서민을 위한 구빈원(救貧院)의 성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십자 병원의 설립, 그리고 복지관 설립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운동은 기독교의 건실한 사회참여 혹은 사회봉사 방식을 보여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치 초기 한국교회가 기독교학교를 설립함으로서 특수계층의 사람들만이 누리던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고 학교교육을 대중화하여 기독교 교육을 가능하게 했던 것과 같다. 또 병원을 설립하여 현대의학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했던 것과 같다. 의료보험조합은 국가 주도의 의료 보험제도가 시작되기 앞서 자의적, 자발적 참여를 통해 영세민들에게 의료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길을 연 것으로서 이 운동은 가난하고 핍절된 이웃을 돌아보는 이상적인 사회참여 혹은 사회봉사의 한 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교회의 부패를 지적하고, 사회개혁을 왜친 일이 없다. 또 인권을 위해서나 민주화를 위해서 투쟁한 일도 없다. 그러나 그는 우리 사회를 개혁하고 개선하는데 누구보다도 더 큰 기여를 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일생동안 생명, 사랑, 평화를 소중히 여겼고 자신의 희생적인 삶을 통해 이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노예해방이나 사회개혁을 위해 정치적인 투쟁을 한 일은 없으나 그가 가르친 사랑은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사회를 개혁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던 것과 같다. 이렇게 볼 때 장기려박사는 기독교적 사랑에 기초한 사회참여 혹은 사회봉사의 모델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그는 선한 사마리아인으로서의 생애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4) 결혼의 신성함과 가정의 중요성 고양
끝으로 그는 이 시대의 조국의 분단과 이데올로기적 대립,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산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북에 아내와 자식을 남겨두고 일생동안 외로이 사셨다. 그도 이성에 대한 연민의 정이 있었고, 인간적 고뇌가 있었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의 재혼 권유가 있었으나 “결혼은 오직 한번 하는 것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따라 40년이 넘도록 홀로 사셨다. 언제 재회할지 모르는 현실에서 혼자 사는 것이 최선의 방식이며, 최선의 윤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결혼의 신성이 파괴되고 분별없는 이혼과 재혼이 반복되는 오늘의 기준으로 볼 때 그의 생활 방식 자체가 오늘 우리 시대에 교훈을 주고 있다. 장기려박사와 깊이 교제해 온 임능빈(林能彬)교수는 대부분의 사람은 단지 육적인 관계에 머물러 있지만 장기려의 부부관계는 영적인 결합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참된 사랑이 무엇이지를 깨닫게 해 준다고 말했다. 임능빈, “장기려박사님과 나”,「부산모임」, 제27호 (1971. 12), 6.
1990년 6월 그가 남긴 망향편지는 우리의 가슴을 적시기에 부족함이 없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리가 없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 봤으나 그저 캄캄한 어둠 뿐, ...... 허탈한 마음을 주체 못해 불을 밝히고 이 편지를 씁니다. 여보!”
이 편지와 함께 남북대화가 있을 때마다 그가 잠 못이루는 밤을 지새며 두고 온 아내 만나기를 소망했던 것을 고려해 보면 그가 혼인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를 감지할 수 있다. 특히 1994년 제2차 고향방문단 일원으로 확정됐으나, 교환 합의가 무산되었을 때 그가 겪은 실망과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 장박사님과 필자는 경남 밀양군 수산교회 모임의 강사로 초청받고 하루 밤씩 강의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북한 방문의 기대 속에 잠을 이루지 못해 예정된 강의를 할 수 없어서 필자가 대신 이틀 밤을 강의한 일이 있다. 두고 온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좌절되었을 때의 아픔을 이해할 만 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윤리에서 볼 때, 일부일처제 원칙(마19:4~6,고전7:10), 항구성의 원칙, 그리고 신실성의 원칙은 결혼과 가정생활의 3가지 원칙으로 알려져 있다. Emil Brunner, The Divine Imperative, 1947, 347.
결혼과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를 결합시키는 것으로서 죽음만이 그것을 갈라놓을 수 있는 전 생애적인 위임(whole life committment)이다. “살아서 아내와 만날 수 있기를 빌고 있지만 사실 나이 팔십이 넘었으니 살아서 못 만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더라도 우리의 사랑은 천국에서까지 영원할 것입니다.”는 그의 말은 감동적이다. 이렇게 볼 때 장기려의 자기희생적인 삶은 오늘의 젊은 세대들에게 혼인의 신성함과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4. 맺는말
이상에서 언급한 바를 종합해 보면 그는 이 시대의 참 의사였으며 참 스승이었고 우리 시대의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삶을 이끌어 온 두 가지 중요한 축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었다. 즉 그는 믿음의 사람이자 선한 의사였다. 그의 헌신적인 의료 활동, 사회봉사활동, 청십자 운동 등은 입술로만이 아닌 구체화된 하나님 사랑의 흔적이었다.
한국교회에는 몇 가지 유형의 인물들이 있었다. 박형룡, 박윤선과 같은 신학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길선주, 이기풍과 같은 부흥운동가들이 있었고, 주기철, 한상동과 같은 신앙운동가들이 있었고, 김교신, 함석헌과 같은 무교회주의자도 있었다. 또 유재기와 같은 농촌운동가도 있었다. 그러나 의사로서 실천적인 삶을 통해 봉사의 삶을 산 사람은 흔치 않다. 이렇게 볼 때 장기려는 한국교회의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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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도서
1. 정기간행물
「부산모임」, 1- 27호 (1956-1971. 12).
「성서신애」, 제259호 (1980. 6).
「성서조선」, 제1호-158호 (1927-1942).
「월간고신」, 1986. 1.
「씨마당」, 제1호-제8호 (1995-1996).
「청십자」, 제1호-제153호 (1971-1985).
2. 단행본
김용준 편,「나의 스승 함석헌」, 해동문화사, 1991.
노평구 편,「金敎臣과 韓國」, 경지사, 1975,
노평구 편,「김교신전집」제1권,
이상규, 「의료선교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한국누가회, 2000.
장기려,「장기려 회고록」, 규장문화사, 1985.
최태사 편,「신앙만의 신앙」, 제일출판사, 1975,
한숭홍,「무교회주의」(두란노, 1993) 36-37
함석헌,「나의 자서전: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삼중당, 1964), 162.
3. 기타
高崎宗司, “金敎臣과 聖書朝鮮”,「文學」, 1980. 2.
失內原忠雄, “김교신을 추억함”,「架信」, 1945. 9.
Brunner, E., The Divine Imperative, 1947, 347.
Sherwood, R., The Life of Rev William James Hall, M.D.
Shriver, G, H., "Philip Schaff as a Teacher of Church History," Journal of Religious History, Vol 47 (March 1969).